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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결성이라는 척도 게임 번역 업계에서 오랫동안 일반적인 워크플로우는 번역-검수라는 2단계 체제였습니다. 말 그대로 번역자가 원문을 번역해서 검수자에게 전달하면 검수자가 번역문을 다듬어서 납품하는 형태였지요. 프로젝트에 따라 드물게는 검수(review)를 두 단계로 나누어 원문과 번역문을 교차 검증하는 편집(editing) 단계 후에 번역문만 보는 교정(proofreading) 단계를 거치는 경우가 있고, 더 흔하게는 검수 다음에 직접 게임을 플레이하며 번역이 적절한지 확인하는 LQA 단계가 추가되는 경우가 있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틀은 거의 항상 번역-검수였습니다. 계속 과거형으로 말씀드리는 이유는 MTPE가 해가 갈수록 부상하고 AIPE라는 새로운 번역 워크플로우가 등장하면서 이 전통적인 2단계 체제의 입지가 계속 좁아.. 더보기
Hades II 번역 후기 — 네메시스, 복수와 응보 테마 어휘라는 주제로 글을 쓰다 보니 네메시스가 생각났습니다. 여러분은 네메시스라고 하면 무슨 단어가 떠오르시나요? 근육질, 싸가지, 츤데레 정도의 대답이 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사실 약간의 배경 지식이 있으면 네메시스라는 캐릭터를 관통하는 더 핵심적인 테마를 포착할 수 있습니다.영미권에서 네메시스의 대표적인 별칭인 Goddess of Retribution을 우리말로는 보통 복수의 여신 내지는 보복의 여신이라고 번역합니다. 작중에서도 비슷하게 Retribution Incarnate라는 타이틀로 등장하지만, 한글판에서는 복수의 화신이 아니라 응보의 화신이라고 옮겼습니다. 그 편이 네메시스의 본질을 더 정확하게 묘사하는 호칭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이 맥락에서 retribution은 네메시스의 업.. 더보기
Hades II 번역 후기 — 테마 어휘 (3) 올림포스 신들의 주제어를 알아보는 마지막 글입니다. 오늘 소개할 네 신은 젊은 축에 속하고 은혜를 많이 주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네요. 디오니소스알딸딸 탄, 천하태평, 인사불성, 회복 탄력성, 끝없는 축배, 둥실둥실, 개인 융자, 흥청망청 — 얼핏 봐도 술과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테마가 느껴집니다. Hey, pull yourself together, baby, we're just getting started!이제 시작인데 벌써부터 해롱해롱하면 곤란해, 동생!▶ '정신이 혼미하다'같이 딱딱한 표현보다, 해롱해롱하다고 하면 취한 모습이 연상되지 않나요? Hey now, come on, that isn't cool! Although you want to know what is? Haha, I think yo.. 더보기
Hades II 번역 후기 — 테마 어휘 (2) 저번 글에 이어서 올림포스 신들의 테마 어휘를 소개하는 글입니다. 저번에 다룬 신들의 주제어가 번개·물·불 등 명확하고 구체적이었다면 이번에 다룰 신들의 주제어는 연줄·사랑·일손 등 모호하고 추상적이어서 테마성이 더 은근하고 눈에 띄지 않게 표현됩니다. 헤라서약 일격, 서약 기예, 혼약 고리, 연분 쇄도, 천부적 마력, 일가친척, 마지막 소원, 신혼의 정열, 액운의 대물림, 성대한 환영, 범상찮은 기품, 한 핏줄, 올바른 양육, 모둠 원소 — 개인과 개인을 잇는 결속이라는 테마가 혼인·가족·출생 등으로 확장됩니다. My word, girl. To have delivered a groveling, impotent Chronos right into our hands, after having utterly .. 더보기
Hades II 번역 후기 — 테마 어휘 (1) Hades II의 등장인물 중 다수는 저마다 관련 어휘랄까, 테마 어휘가 있습니다. 제우스라면 전기·번개·벼락, 포세이돈이라면 바다·파도·항해, 헤스티아라면 화염·열기·불꽃 등 본인의 테마에 맞는 단어를 말합니다. 테마 어휘를 적절히 사용하면 등장인물의 개성이 살아나고 읽는 재미가 생깁니다. 가령 누가 조급하게 굴 때 제우스라면 '번갯불에 콩 볶아 먹겠다'고 할 것을 헤스티아라면 '발등에 불 떨어졌냐'고 하겠지요. 문제는 이런 테마성을 번역에 살리기 힘든 경우가 흔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헤르메스의 은혜를 받을 때 나오는 대사 중 하나는 "Time to send a message."입니다. 헤르메스가 전령이기에 message(전갈)라는 테마 어휘를 쓴 것이죠. 그런데 이를 번역하면 '교훈을 줄 시간.. 더보기
Hades II 번역 후기 — 캐릭터화 Hades II가 정식 출시된 지 어느덧 일 년 가까이 흘렀습니다. 앞서 해보기 출시 전부터 3년가량 정말 열심히 작업한 프로젝트라 감회가 특별하네요. 살면서 이렇게 공을 많이 쏟을 프로젝트가 다시 있을까 싶을 만큼, 과장을 조금 보태면 영혼을 갈아넣은 나날이었습니다. 언어유희(wordplay)가 많고 근대 영어와 현대 영어를 오가는 원문의 특성상 의역이 들어간 부분이 많아서 비판이 나오지 않을까 내심 걱정했는데, 커뮤니티 등지를 보니 다행히도 번역이 잘되었다고 칭찬해 주시는 분들이 많아서 안심했고 참 감사했습니다. 워낙 대사량이 많고 큰 프로젝트였던 만큼, 작업하며 나름의 번역 철학이랄까, 영어와 한국어가 어떻게 다른지 많이 절감하고 생각을 정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그중 하나인 캐릭터화(ch.. 더보기
국어사전에 나오지 않는 뜻 번역에 사전은 빠질 수 없는 도구입니다. 작업하다 보면 영영사전, 영한사전, 국어사전, 때로는 한자사전까지 두루 찾아보게 됩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사전도 언어의 전부를 담아내지는 못합니다. 검수를 하다 보면 영한사전에 지나치게 기댄다 싶은 번역을 더러 만나게 되는데, 이러면 충실한 번역이더라도 독자 입장에서는 감점 요소가 됩니다. 국어사전 역시 꼭 필요한 참고서지만, 사전에 나오는 뜻풀이가 한국어의 전체는 아닌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은 표제어의 실제 쓰임새가 국어사전의 뜻풀이에서 다소 벗어나는 경우를 몇 가지 소개하고자 합니다.아련하다표준국어대사전1. 똑똑히 분간하기 힘들게 아렴풋하다.그때 그 시절의 추억이 아련하다.고려대한국어대사전1. (일이나 그 기억이) 또렷하거나 분명하지 않고 희미.. 더보기
Responsible과 책임감 게임을 오래 즐겨오신 분들은 responsible gaming이라는 표현을 한 번쯤 들어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대개 '책임감 있는 플레이' 정도로 옮겨지는 표현인데, 저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어색한 번역이라는 느낌을 떨칠 수 없습니다. 한국어에서 책임감이란 대개 의무나 타인에 대한 책임감이기 때문입니다.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니 "맡아서 해야 할 임무나 의무를 중히 여기는 마음"이라고 풀이되어 있군요. 함께 실린 예문들은 이렇습니다. 그는 이 사태를 하루빨리 수습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마음이 무거웠다.그는 벌써부터 장남으로서의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그에게는 이제 선택권 대신 남쪽으로 가야 한다는 책임감 하나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보시다시피, 같은 자리에 의무감을 대신 써도 이상하지 않을 문맥들입니..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