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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des II

Hades II 번역 후기 — 네메시스, 복수와 응보

테마 어휘라는 주제로 글을 쓰다 보니 네메시스가 생각났습니다. 여러분은 네메시스라고 하면 무슨 단어가 떠오르시나요? 근육질, 싸가지, 츤데레 정도의 대답이 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사실 약간의 배경 지식이 있으면 네메시스라는 캐릭터를 관통하는 더 핵심적인 테마를 포착할 수 있습니다.

영미권에서 네메시스의 대표적인 별칭인 Goddess of Retribution을 우리말로는 보통 복수의 여신 내지는 보복의 여신이라고 번역합니다. 작중에서도 비슷하게 Retribution Incarnate라는 타이틀로 등장하지만, 한글판에서는 복수의 화신이 아니라 응보의 화신이라고 옮겼습니다. 그 편이 네메시스의 본질을 더 정확하게 묘사하는 호칭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맥락에서 retribution은 네메시스의 업인 divine retribution을 한마디로 줄인 단어입니다. 직역하면 '신의 복수'가 되어야겠지만, 사실은 인간의 죄악(특히 분수에 넘치는 오만)에 대한 '신의 처벌'에 가깝습니다. 한자 문화권에서 대응어를 찾자면 '천벌'이고, 업을 지으면 보가 따른다는 불교의 업보 내지는 인과응보와 상통하는 개념입니다. 이런 뜻을 담아내기에 '복수'라는 단어는 사사로운 원한을 갚는다는 뉘앙스가 지나치게 강하지 않을까요?

복수와 응보 간의 이런 차이를 조명하는 하데스의 대사가 있습니다. 복수(Vengeance)는 가족의 원수를 갚으려는 멜리노에를 가리키는 것이고, 응보(Retribution)는 물론 응보의 화신인 네메시스를 가리키는 것이지요.

 

신으로서 네메시스의 일은 응보를 내리는 것, 다시 말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응당한 상벌을 내리는 것입니다(물론 신화에서건 작중에서건 상보다는 벌이라는 측면이 부각됩니다). 그래서 네메시스는 '~라는 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 또는 '~라는 벌을 받아도 싸다'라고 번역되는 deserve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삽니다. 멜리노에에게 받은 암브로시아를 두고 '나는 이걸 마실 자격이 없다'는 대사, 크로노스의 난을 두고 '우리는 이런 변을 당해도 싸다'는 대사를 예시로 꼽을 수 있겠네요.

여기에서 네메시스의 또 다른 테마가 파생됩니다. 자신이 받아 마땅한 몫에 만족하라, 분수를 지키고 욕을 부리지 말라는 테마입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중용, 중도, 절제라고 할까요. 가장 와닿는 단어는 과유불급이지만, 네메시스의 경우는 '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라기보다는 '넘쳐서도 모자라서도 안 된다'에 가깝습니다(역시나 보다 가 중점이긴 합니다). 멜리노에가 주는 암브로시아를 네메시스가 거절하며 하는 대화가 바로 과잉에 대한 경계입니다.

 

작중의 네메시스가 deserve 다음으로 좋아하는 단어가 있다면 fair일 것 같습니다. 네메시스의 대사를 가만히 들어보시면 "fair enough"나 "fair is fair" 같은 관용어를 참 많이 씁니다. fair가 just(정의로운)의 유의어이기 때문이지요. 영어 justice에는 '악행이 처벌받는다'는 뉘앙스가 녹아있는데, 일상에서 흔히 쓰는 '정의 구현' 등의 표현을 생각하면 한국어 '정의'도 마찬가지인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