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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des II

Hades II 번역 후기 — 캐릭터화

Hades II가 정식 출시된 지 어느덧 일 년 가까이 흘렀습니다. 앞서 해보기 출시 전부터 3년가량 정말 열심히 작업한 프로젝트라 감회가 특별하네요. 살면서 이렇게 공을 많이 쏟을 프로젝트가 다시 있을까 싶을 만큼, 과장을 조금 보태면 영혼을 갈아넣은 나날이었습니다. 언어유희(wordplay)가 많고 근대 영어와 현대 영어를 오가는 원문의 특성상 의역이 들어간 부분이 많아서 비판이 나오지 않을까 내심 걱정했는데, 커뮤니티 등지를 보니 다행히도 번역이 잘되었다고 칭찬해 주시는 분들이 많아서 안심했고 참 감사했습니다.

 

워낙 대사량이 많고 큰 프로젝트였던 만큼, 작업하며 나름의 번역 철학이랄까, 영어와 한국어가 어떻게 다른지 많이 절감하고 생각을 정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그중 하나인 캐릭터화(characterization), 즉 캐릭터가 사용하는 말투나 어휘 등으로 캐릭터의 개성을 드러내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모든 캐릭터가 비슷한 단어와 말투를 쓴다면 집필(writing) 면에서 캐릭터화가 약한 게임, 캐릭터별로 쓰는 단어와 말투가 극명히 다르다면 캐릭터화가 강한 게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Hades II 원문에서 캐릭터화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애칭(pet name)입니다. 등장인물별로 주인공 멜리노에를 부르는 다양한 별명이 있지요. 헤카테는 평이하게 멜리노에(Melinoë)라고 부르지만, 이카로스는 줄여서 멜리(Meli)라고 부르고, 도라는 한 술 더 떠서 멜(Mel)이라고 부릅니다. 데메테르가 멜리노에를 손녀(Granddaughter)라고 부른다면 헤라는 얘(dear)라고 부르고, 헤스티아는 더 친근하게 아가(dearie)라고 부르죠. 그래서 화자 정보가 없더라도 어느 등장인물의 대사인지 쉽게 유추할 수 있습니다.

 

반면 Hades II 한국어 번역문에서 캐릭터화에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은 어미, 특히 종결 어미입니다. 이는 사실 한국어에서 자연스럽게 쓸 수 있는 2인칭 호격 명사가 영어에 비해 턱없이 적기 때문입니다. 영어에서는 거의 모든 명사를 호격으로 쓸 수 있습니다. 가령, 영어로는 "How are you doing, farmer?"라고 해도 맥락만 맞는다면 이상할 것이 없지만, 한국어로 "안녕하세요, 농사꾼?"이라고 하면 일상에서 도저히 들어보지 못할 법한 문장입니다. 한국어 대화문에서 이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은 "아저씨", "선생님", "사장님" 등 상당히 한정적입니다. 그래서 영문의 다종다양한 애칭에 하나하나 다른 한국어 번역어를 찾는 데는 애로가 꽃핍니다. 헤스티아는 멜리노에를 dearie 아니면 hot stuff라고 부르는데, 양쪽 다 한국어로는 전자에 가까운 '아가'로 처리했습니다. 후자의 번역어로 '화끈아' 등을 고민해 보았지만, 역시 억지스러운 번역이고 대화의 자연스러움을 해친다는 생각에 타협을 본 셈입니다.

 

번역이란 출발어와 도착어 사이에서 타협을 보는 작업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원문에 충실하려고 하면 한국어로서 부자연스러운 문장이 나오고, 한국어로서 자연스러운 문장을 쓰려고 하면 원문에서 벗어나기 십상입니다. 이를테면 여러 등장인물이 쓰는 사촌(Cousin)이라는 호칭만 해도 그렇습니다. 한국어에서 '사촌'은 일반적으로 2인칭 호칭이 아닙니다. 사촌을 부를 때 '사촌'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손위 사촌이라면 형·오빠·누나·언니라고 부르는 편이, 손아래 사촌이라면 그냥 이름을 부르는 편이 일반적입니다. 따라서 한국어의 논리에 충실한 번역이라면 멜리노에가 아폴론과 아테나를 부를 때 쓰는 Cousin이라는 호칭을 '오빠' 내지는 '언니'로 옮겼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빠(Brother)와 언니(Sister)라는 호칭을 이미 자그레우스와 아르테미스가 가져갔다는 점입니다. 멜리노에가 자그레우스 외의 등장인물을 오빠라고 부른다면 관계의 특수성이 옅어지고 원문에서 Brother와 Cousin이라는 각기 다른 호칭으로 구분 지으려 했던 거리감이 희미해집니다.

 

영어에서 캐릭터별 개성이 호칭이라면 한국어에서 캐릭터별 개성은 어미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르테미스가 좋은 예시입니다. 원문에서 멜리노에와 아르테미스의 사이가 가깝다는 점을 나타내는 주된 장치는 역시 호칭입니다. 멜리노에가 Lord나 Lady라는 접두사를 거의 붙이지 않는 유일한 올림포스 신이기 때문이죠. 올림포스 신 중에서 가깝고 젊은 축에 속하는 헤르메스도 웬만하면 Lord Herems(헤르메스 님)라고 부르는 멜리노에가 아르테미스만은 Lady Artemis(아르테미스 님)라고 부르는 경우가 좀처럼 없습니다. 두 여신이 그만큼 친근한 사이라는 점을 플레이어에게 보여주는 장치지요. 그런데 한국어 플레이어에게는 그보다 더 눈에 띄는 단서가 있습니다. 예의 바른 멜리노에가 아르테미스에게 첫 만남부터 반말을 한다는 점입니다.

 

영어에는 없는 어미라는 수단 덕분에 어떤 때는 한국어가 더 캐릭터화가 용이하기도 합니다. 가령, 게임 속 대사 하나를 인용해 보겠습니다.

Why, Niece, you're bleeding everywhere! I can't keep watch over your every move, you know! You must be careful, at least until you have some of my might!
이런, 조카야, 아주 피투성이가 됐구나! 내가 네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봐 줄 수는 없으니까 조심해라! 그래도, 내 힘의 일부를 받고 나면 조심할 것도 없을 거다!

 

누구 대사인지 유추가 되시나요? 일단 조카(Niece)라고 부른 이상 제우스 아니면 포세이돈일 텐데, 둘 중 누구인지 이렇다 할 단서가 없습니다. "you're"과 "can't" 등 축약형의 사용으로 미루어 보아 포세이돈 쪽에 무게가 실리지만, 제우스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요. 그런데 번역문을 보면 확실해집니다. -라거다라는 어미가 확실한 단서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어 번역문에서 제우스는 이 자리에 항상 -거라게다를 씁니다(문법적으로 거다/게다는 어미가 아니지만, 캐릭터화 맥락에서 어미 비슷한 역할을 하기에 그냥 어미라고 하겠습니다).

 

조금 더 극명한 예시를 들어볼까요?

We need to talk.
대화를 하.

 

이것이 누구 대사인지, 원문에는 유추할 단서가 전혀 없습니다. 등장인물 중 가장 구어체를 구사하는 도라의 대사래도 이상하지 않고, 가장 고어체를 구사하는 카오스의 대사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국어 번역문을 보면 세 명으로 범위를 좁힐 수 있습니다. 마흔이 넘는 등장인물 중 멜리노에에게 -세라는 하게체 어미를 쓰는 캐릭터는 아테나, 아레스, 헤라클레스 단 셋이기 때문입니다.

Hold fast, Cousin!
버티, 사촌!

 

멜리노에를 사촌(Cousin)이라고 부르는 올림포스 신은 두 명, 아폴론과 아테나입니다. 그런데 아폴론은 하게체가 아니라 평이한 해체를 쓰기 때문에, 번역문을 보면 화자를 아테나로 특정할 수 있습니다. 대사만 보아도 화자를 알 수 있다는 말은 그만큼 캐릭터화가 강하다는 뜻이지요. 사족이지만, 아폴론과 아테나는 유독 이름을 헷갈리기 쉬운 그리스 신이기도 합니다. 아폴론은 동일시되는 로마 신이 아폴로라는 거의 비슷한 이름이고, 아테나는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와 이름이 흡사해서 인터넷 등지에서 아폴로/아테네라고 개명을 당하는 일을 종종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와 로마 신화를 뭉뚱그려 그리스로마 신화라고 퉁치는 경향이 서구보다 강한 우리나라라서 그런 걸까요?

 

고어체와 옛스러운 느낌을 표현하는 주된 수단 역시 한국어에서는 어미입니다. Hades II에서 고어체를 쓰는 대표적 캐릭터로는 헤카테, 카오스, 크로노스를 들 수 있는데, 원문에서 이들은 고색창연한 단어와 표현을 씁니다. 헤카테가 애용하는 'tis라든지, 호메로스가 자주 쓰는 ever- 및 once- 따위의 접두사가 좋은 예시입니다. 물론 번역문에도 그에 상응하는 옛말 어휘를 썼지만, 플레이어 입장에서 그보다도 눈에 띄는 것은 역시 어미겠지요. 다른 어휘가 평이하더라도 어미가 -거니와, -거늘, -나니 등이면 옛말투라는 느낌이 확 삽니다. 헤카테의 대사를 예시로 발췌하겠습니다.

옛스럽다고 할 만한 어휘가 없는데도 옛스러운 느낌이 드는 것은 -ㄴ즉-거라라는 어미 때문입니다. 똑같은 단어를 쓰되 어미만 현대 구어체로 평이하게 바꾸면 이렇게 됩니다. 

느낌이 많이 다르지 않나요? 나이 많은 신들의 옛스러운 말투를 살리려고 적합한 어미를 찾는 것은 작업 내내 신경 쓴 부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