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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사전에 나오지 않는 뜻 번역에 사전은 빠질 수 없는 도구입니다. 작업하다 보면 영영사전, 영한사전, 국어사전, 때로는 한자사전까지 두루 찾아보게 됩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사전도 언어의 전부를 담아내지는 못합니다. 검수를 하다 보면 영한사전에 지나치게 기댄다 싶은 번역을 더러 만나게 되는데, 이러면 충실한 번역이더라도 독자 입장에서는 감점 요소가 됩니다. 국어사전 역시 꼭 필요한 참고서지만, 사전에 나오는 뜻풀이가 한국어의 전체는 아닌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은 표제어의 실제 쓰임새가 국어사전의 뜻풀이에서 다소 벗어나는 경우를 몇 가지 소개하고자 합니다.아련하다표준국어대사전1. 똑똑히 분간하기 힘들게 아렴풋하다.그때 그 시절의 추억이 아련하다.고려대한국어대사전1. (일이나 그 기억이) 또렷하거나 분명하지 않고 희미..
Responsible과 책임감 게임을 오래 즐겨오신 분들은 responsible gaming이라는 표현을 한 번쯤 들어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대개 '책임감 있는 플레이' 정도로 옮겨지는 표현인데, 저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어색한 번역이라는 느낌을 떨칠 수 없습니다. 한국어에서 책임감이란 대개 의무나 타인에 대한 책임감이기 때문입니다.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니 "맡아서 해야 할 임무나 의무를 중히 여기는 마음"이라고 풀이되어 있군요. 함께 실린 예문들은 이렇습니다. 그는 이 사태를 하루빨리 수습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마음이 무거웠다.그는 벌써부터 장남으로서의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그에게는 이제 선택권 대신 남쪽으로 가야 한다는 책임감 하나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보시다시피, 같은 자리에 의무감을 대신 써도 이상하지 않을 문맥들입니..
Available과 이용 가능 번역기는 언제쯤 번역자를 대체할 수 있을까요? '기계 번역이 사람의 번역만큼 자연스러워지는 시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기계 번역에 대한 일반적 인식은 '뜻은 정확할지 몰라도 어색한 절름발이 번역문'이었으니까요. 그런데 해가 갈수록 기계 번역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기술의 발전 때문만은 아닙니다. 언중이 기계 번역의 직역체에 점점 익숙해지고 그런 문장을 자연스럽다고 인식하는 것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요인입니다. 특히 게임 커뮤니티는 영어에 대한 거부감은커녕 다소의 선망마저 있는 젊은 층이 주축이기에 이런 변화가 더욱 빠른 것 같습니다. 근래 이런 흐름을 부쩍 실감하게 되는 것은 available을 덮어놓고 '이용 가능' 또는 '사용 가능'으로 번역하는 추세입니다. 제가 최근 일하..
개로 퉁쳐지는 단위 명사 저번에 '멋진'으로 퉁쳐지는 영단어들을 알아본 데 이어, 이번에는 '개'로 퉁쳐지는 단위 명사들의 수난을 알아보려 합니다. 한국어는 영어에 비해 단위 명사가 많습니다. 한국어는 학생 3명, 고양이 3마리, 장미 3송이를 각자 다른 단위 명사로 세어주지만 영어로는 전부 3 students, 3 cats, 3 roses라고 씁니다. 한영 번역자는 명이든 마리든 송이든 전부 생략하면 그만이니 비교적 고민거리가 적겠죠. 반면에 영한 번역자는 영문에 없는 단위 명사를 찾아서 번역문에 붙여 주어야 한다는 부담이 생깁니다. 가령, 3 roses를 '장미 3송이'로 옮길 때 송이라는 적확한 단위 명사를 찾는 것은 번역자의 몫이라는 뜻이죠. 그래서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한의 분량을 옮기려는 역자는 어지간한 명사에 전부 ..
멋지게 멋진 영단어들 제가 얼마 전 검수한 문장들을 (보안상 조금 각색해) 소개합니다. 쭉 읽어보시면 제가 이번 글을 쓰게 된 계기를 어렵지 않게 짐작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Good choice! Now pick the car you like and confirm the purchase.멋진 선택이야! 이제 원하는 차를 선택하고 구매를 확인해.Thank you, Daniel! You’re amazing!고마워, 다니엘! 정말 멋져!If you’re looking for a fab car, you can’t go wrong with Daniel.멋진 차를 찾고 있다면, 다니엘을 선택하도록 해.Take care of my new baby. Hmm, I need to come up with a cool name.내 새 애마를..
수식 공간 부족 오늘은 짧고 수수한 구어체보다는 길고 화려한 문어체를 번역할 때 많이 맞닥트리는 문제를 다뤄보려 합니다. Spent and exhausted, the glorious king of the Olympians who is known for his temper let out a small sigh.몹시 지치고 피곤한 영광스러운 성격 있기로 유명한 올림포스 신들의 왕은 작은 한숨을 토했다. 원문을 그대로 옮기면 보시다시피 가독성이 영 좋지 않은데, "몹시~신들의"에 걸치는 수식구가 너무 길기 때문입니다. 독자는 피수식어(왕)가 무엇인지 모르는 채 수식어를 다섯 개나 읽어야 하는데, 이러면 문장의 안정감이 몹시 떨어지는 데다 "몹시~유명한"이 "올림포스 신들"을 수식하는지 "왕"을 수식하는지 모호합니다. 반면에 ..
눈알 굴러가는 소리 roll eyes라는 영어 표현이 있습니다. 아래 그림처럼 먼 산 보면서 불쾌감 내지는 당혹감을 드러내는 표정을 가리키는 말인데, 한국어로 옮기려면 참 대응어가 마땅치 않습니다. 직역하면 '눈알을 굴리다'가 되겠지만, 이건 이리저리 흘끗흘끗 훔쳐본다는 뉘앙스가 강하지 않나요? 맥락에 따라 '눈을 부라리다'도 써봄 직하지만, 이쪽은 상대를 똑바로 쏘아본다는 느낌입니다. '눈을 희번덕대다'도 뜻으로만 보면 정확한 번역이지만, '희번덕'이라는 표현이 보통 '눈을 까뒤집다'처럼 어떤 강렬한 감정에 사로잡힌 상태를 묘사하는 데 쓰이는지라 roll eyes처럼 약간의 불쾌감을 나타내는 표현은 아니군요.사실 이건 언어 차이 이전에 문화 차이인 듯합니다. 한국인은 보통 이런 상황에 이런 표정으로 이런 의미를 전달하지 ..
나를 울리는 것들 '것'은 한국어 입말에서 참 애용되는 표현입니다. 무슨 문장이든 '것'을 넣으면 더 원어민스러워진다고 하면 과언일까요? '그건 왜 그럴까'보다 '그건 왜 그런 걸까'가, '그건 좋지 않다'보다 '그건 좋은 게 아니다'가 일상에서 들을 법한 문장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간결함이 미덕인 글말에서는 (설령 대화문이라도) 이렇듯 별 뜻 없는 '것'들을 솎아내는 편이 글이 한결 깔끔해집니다. 영어는 한국어보다 추상화에 능하고 명사 비중이 큰 언어입니다. 한국어로 '새사람이 되려면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라고 할 것을 영어로는 'Turning over a new leaf requires determination'이라고 합니다. 다시 한국어로 직역하면 '새사람이 되는 것은 결단을 필요로 한다'가 되겠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