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람이 영어를 배울 때 가장 익히기 힘든 것 중 하나가 관사입니다. 어떨 때 a를 쓰고 어떨 때 the를 쓰고 어떨 때 둘 다 쓰지 않는지, 설명을 들으면 알 것 같다가도 실제로 영작을 해보려고 하면 헷갈리기 일쑤죠. 관사라는 개념이 한국인에게 쉽게 와 닿지 않는 이유는 한국어에 비슷한 개념이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 영어는 거의 모든 명사 앞에 무언가 따라붙습니다. 가령 ball이라 하면 a ball, the ball, my ball, his ball, her ball, this ball, that ball 등으로 활용되죠. 그런데 이렇게 다양한 ball들이 한국어로 번역될 때는 그냥 '공'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니, 원문에는 that ball이라는 정보가 있는데 역자가 멋대로 생략해도 되는 겁니까? 네, 열에 아홉은 생략해도 무방합니다. 이런 '유사 관사'는 꼭 필요한 정보여서가 아니라 빈자리를 채우려고 넣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한국어의 경우, 축구장에 공이 하나밖에 없다면 그냥 "공 좋네"라고 해도 오해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영어의 경우 문법상 ball 앞에 무언가는(!) 와야 합니다. 이 맥락에서는 the ball, this/that ball 가운데 하나를 골라야지, 그냥 "ball is nice"라고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물론 입말로는 종종 씁니다.) 비슷한 예를 하나 더 들어보겠습니다.
The headline was like a punch to my stomach.
머리기사를 보니까 (내)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번역문에서 내는 생략하는 편이 자연스러운 군말입니다. 그렇다면 원문은 왜 없어도 그만인 my라는 단어를 굳이 넣었을까요? 영어로는 그냥 stomach라고 쓸 수 없고 어차피 a stomach, the stomach, my stomach 등 중에서 골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맥락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선택지는 물론 my stomach입니다.
'생략할 수 있는 -들은 생략하라'는 글쓰기 조언도 비슷한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영어 문법상 가산 명사(countable noun)는 반드시 단수형과 복수형을 구별해서 써야 합니다. 반면에 한국어는 그럴 의무가 없기에, 원문의 단수/복수 여부를 번역문에 그대로 옮기려고 하면 잉여 정보가 덕지덕지 붙은 문장이 되기 쉽습니다.
A father and a son were eating pancakes and green peas.
한 아버지와 한 아들이 케이크들과 완두콩들을 먹고 있었다.
아버지와 아들이 케이크와 완두콩을 먹고 있었다.
그렇다면 반대로 한국어에서 '형식상의 정보'는 무엇이 있을까요? 대표적인 예시로 종결 어미를 들 수 있을 듯합니다. 한국어의 모든 온전한 문장은 종결 어미가 필요한 만큼, 어떤 유의미한 정보가 있어서라기보다는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형식상' 들어가는 종결 어미도 간간이 있습니다. 이런 종결 어미는 영어로 번역할 때 생략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내가 이거 진짜 잘해요.
내가 이거 진짜 잘하거든요.
내가 이거 진짜 잘하는데.
한국어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한다면 각각 "I'm really good at this," "Because I'm really good at this," "But I'm really good at this"쯤으로 옮길 수 있겠지만, 사실은 그렇게 차별화해서 번역할 만큼 의미상 차이가 크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대부분의 맥락에서는 셋 모두 "I'm really good at this"로 옮겨도 무리가 없을 듯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