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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You)를 피하는 방법

영한 번역자의 머리를 아프게 하는 단어를 꼽자면 you는 적어도 5위 안에 들어갈 듯합니다. 한국어는 you처럼 범용적으로 쓰이는 2인칭 대명사가 없기도 하고, 문맥에 딱 들어맞는 번역어를 찾기 힘든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가장 흔한 대응어로는 ·당신·여러분 등이 있는데, 이중에서 가장 만만한 단어는 역시 입니다. you만큼은 아니라도 실생활에서 자주 쓰이고 너네·너희 따위로 복수형·소유격을 나타낼 수 있는지라, 대화문을 번역할 때 서로 반말을 하는 사이라면 번역이 한결 수월합니다. 존댓말을 하는 사이라면 you를 에둘러 번역문에 집어넣을 창의적 방법을 고민해야 하기 때문이죠. 예를 들면 이런 식입니다.

You put him in his grave. You're why he drank. (#1)
무덤에 넣은 것도 어머님이죠. 그이가 누구 때문에 술을 마셨는데요.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남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따져 묻는 맥락입니다. 이럴 때 you의 정석적인 번역어는 '어머님'이겠지만, 바로 앞에 '어머님'을 썼기에 동어 반복을 피하고 싶다면 생각해 봄 직한 번역입니다. 번역문의 두 번째 문장에 you의 대응어가 들어가지 않았지만 의미가 불명확해지지 않았다는 것이 포인트입니다. 조금 더 전통적인 접근법을 취해볼까요?

You put him in his grave. You're why he drank. (#2)
무덤에 넣은 것도 당신이죠. 당신 때문에 그이가 술을 마신 거잖아요.

 

네, 가장 간편한 접근법입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그냥 당신으로 옮기는 것이죠. 남발하면 게으른 번역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힘들지만, 여기서는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대드는(!) 맥락이기 때문에 공격적 어투를 반영하고 싶다면 괜찮은 번역일 수 있을 듯합니다. 사족이지만, 한국어 '당신'은 굉장히 희한한 단어입니다. 데면데면한 관계에서 쓰면 정답기는커녕 공격적으로 들리기 쉬운 호칭인데(서로 XX 씨라고 부르는 관계에서 한쪽이 갑자기 '당신'이라고 하면 무슨 느낌일지 상상해 보세요),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인 부부 관계에서는 서로를 높이는 호칭으로 쓰이고, 글말에서는 번역투의 영향으로 낮춤 높임 할 것 없이 범용적인 2인칭 대명사로 쓰이죠.

You put him in his grave. You're why he drank. (#3)
무덤에 넣은 것도 어머님이죠. (당신이) 그이가 술을 마신 이유잖아요.

 

역시나 전통적인 접근법입니다. 소위 '주어 생략'이라는 기술인데, 꼭 주어만 생략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he·she·they 등 직역하기 어색한 대명사가 나올 때 최소한의 노력을 들여서 (겉보기나마) 자연스러운 번역문을 써내는 '대명사 생략'이라는 고급 기술로도 응용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문에서 "he"가 누구인지 모르겠고 별로 알고 싶지도 않은데 '그'로 옮기면 어색할 테니까 그냥 생략해 버리는 것이죠. 그러면 이렇게 됩니다.

You put him in his grave. You're why he drank. (#4)
무덤에 넣은 것도 어머님이죠. (당신이) (그가) 술을 마신 이유잖아요.

 

일단 '당신'도 없고 '그'도 없으니까 번역체라는 비판은 피할 수 있겠지만, 번역문이 뜻이 모호한 수준을 넘어서 아예 이해할 수 없는 지경입니다. 안 좋은 추억이 떠오르는 바람에 과하게 냉소적으로 적었지만, '주어 생략'과 '대명사 생략'은 실제로 빈번히 쓰이는 유용한 기술입니다. 물론 역자가 '귀차니즘' 때문에 남발해서는 안 되고, 생략된 주어와 대명사가 무엇인지 독자가 문맥만 보고 파악할 수 있도록 작문하는 배려가 필요하겠죠.

You put him in his grave. You're why he drank. (#5)
무덤에 넣은 것도 어머님이죠. (당신이) 그이가 술을 마신 이유잖아요.

 

3번 예문과 비교하면 '시'가 추가됐을 뿐인데, 뜻이 한결 명확해졌습니다. 이처럼 -시-는 영한 번역에서 사실상 you를 대체하는 경우가 흔합니다. 번역자 입장에서 반말의 장점은 '너'를 쓸 수 있다는 점, 존댓말의 장점은 '시'를 쓸 수 있다는 점이라고 할까요. 조금 우스꽝스럽지만 예를 들자면 이런 식입니다.

Are you dumb or something?
아니, 너 바보야? (반말)
아니, 바보세요? (존댓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