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뜻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다른 출발어-도착어 쌍을 '가짜 쌍'이라고 부릅니다. 영한 번역에서는 흔히 cider와 사이다, cunning과 컨닝, service와 서비스 등이 대표적인 가짜 쌍으로 꼽힙니다. cider는 우리가 아는 탄산음료가 아니고, cunning은 답안을 훔쳐보는 부정행위가 아니며, service는 공짜로 주는 덤이 아닙니다. 그런데 실은 이렇게 명명백백한 '진짜 가짜 쌍'보다 뜻은 비슷한데 뉘앙스가 좀 다른 '반쯤 가짜 쌍'이 훨씬 많습니다. apart와 아파트, mansion과 맨션, event와 이벤트 등을 예시로 들 수 있을 듯합니다. apart는 아파트가 아닌 집/방도 가리킬 수 있고, sale은 세일이 아닌 정가 판매를 가리킬 수 있으며, event는 이벤트가 아닌 사건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이런 경우는 한국어가 영어보다 외연이 작은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는 영단어가 한국에 들어올 때 일부 용례만 정착되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아파트는 외국에서 들어온 신문물인 만큼 한국어로 달리 부를 말이 없었기 때문에 apart를 그대로 따와서 '아파트'라고 불렀지만, 그렇다고 기존의 다른 주택이나 방들까지 '아파트'라고 부를 이유는 없었을 겁니다.
이런 '반쯤 가짜 쌍'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것은 nuance와 뉘앙스입니다. 한국어에서 '뉘앙스'라는 단어는 흔히 이런 식으로 쓰입니다.
그건 그런 뉘앙스가 아니다.
그건 뉘앙스가 좀 다르다.
그건 그런 뉘앙스가 있다.
반면 영어에서 nuance는 보통 이런 식으로 쓰입니다.
That is a nuanced issue.
That is filled with nuance.
That has no nuance whatsoever.
차이가 느껴지시나요? nuance의 어원인 색에 비유하자면, 한국어 '뉘앙스'는 특정 색 하나하나를 가리키는 반면 영어 'nuance'는 색의 유무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뉘앙스'의 관심사는 그것이 빨간색인지 파란색인지, 파란색이라면 옅은 파란색인지 짙은 파란색인지입니다. 반면 'nuance'의 관심사는 그것이 흑백인지 칼라인지, 칼라라면 옅은 색과 짙은 색이 구분되는지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앞서 든 영어 예문을 직역해 보겠습니다.
That is a nuanced issue. 그건 뉘앙스가 있는 문제다.
That is filled with nuance. 그건 뉘앙스가 가득하다.
That has no nuance whatsoever. 그건 뉘앙스가 하나도 없다.
'뉘앙스'의 용례에 익숙한 한국어 화자라면 첫 문장을 보고 '무슨 뉘앙스?'라는 의문을 가질 겁니다. 한국어로서 이 문장은 상당히 이상한 문장이기 때문입니다. 빗대자면 파란색 물감을 앞에 두고 "저건 채도가 있는 파란색이다."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청자는 '그래서 채도가 높은데 낮은데?'라는 의문이 들 수 밖에 없습니다. 모든 파란색에는 채도가 있는 만큼, "채도가 있는"이라는 구절은 아무 정보도 담기지 않은 무용지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nuanced issue'라는 건 무슨 뜻일까요? 단순한 흑백 논리로 접근할 수 없는 복잡한 문제라는 뜻입니다. 가령, '게임은 청소년에게 해로운가'라는 문제가 nuanced issue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게임은 모든 청소년에게 해롭다'와 '모든 게임은 모든 청소년에게 이롭다'라는 양극단의 견해보다 '환경과 습관에 따라 해로울 수도 있고 이로울 수도 있다'라는 복잡미묘한 견해(nuanced opinion)가 정답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색깔 비유로 돌아가서, 양극단의 견해를 흰색과 검은색이라고 해봅시다. 그러면 다크 그레이, 쿨 그레이, 웜 그레이 등 다양한 중도 견해가 있을 겁니다. 그러면 영어 화자는 'That's a nuanced opinion'이라고 할지언정 콕 집어서 'That has a dark gray nuance'라고는 잘 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한국어 화자는 '그건 이렇고 저런 뉘앙스다'라고 할지언정 뭉뚱그려서 '그건 뉘앙스가 있다'라고는 잘 하지 않습니다.
이런 뉘앙스의 차이는 말로 설명하려면 참 쉽지 않습니다. 최선을 다해 설명했지만 독자분들이 납득할 만한 설명이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보통은 이렇게 곰곰이 생각해서 글로 옮길 시간이 없으니까 그냥 '이 문장은 부자연스럽다' 하고 넘어갑니다. 하지만 가끔은 언어 감각에만 의존하지 말고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를 생각해 보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