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국어대사전에서 애를 검색하면 "아이의 준말"이라는 간결한 뜻풀이가 나옵니다. 그렇다면 얼핏 생각할 때 애와 아이는 서로 바꿔 쓸 수 있어야 합니다. 애를 쓸 자리에 아이를 써도 문제가 없고 아이를 쓸 자리에 애를 써도 문제가 없어야 한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그럴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친구끼리 이런 대화를 한다고 상상해 봅시다.
다온: 아니 ㅋㅋㅋ 애가 안경을 쓰고 지 안경을 찾고 있더라니까?
경진: 그래, 나 멍청하다. 뭐 보태준 거 있냐?
승현: 너무 놀리지 마라. 좀 모자라도 애는 착하잖아...
이 예문에서 애는 둘 다 경진(33)을 가리킵니다. 아이라고 부르기에는 나이가 있는 사람이지요. 그런데 애라는 대명사가 어색하지 않은 것은 왜일까요? 여기서 애는 나이보다도 친분 관계 또는 위계를 나타내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경진보다 나이가 어리더라도 다온 입장에서 안면이 없거나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면 쉽사리 애라고 부를 수 없을 겁니다. 즉, 아이라는 본말에는 없던 새로운 뜻이 애라는 준말에 생겼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얘를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찾아보면 "이 아이가 줄어든 말"이라고 풀이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얘는 이 아이 또는 이 애와 서로 바꿔 쓸 수 있을까요? 짐작하시다시피, 그렇지 않습니다. 역시나 예시를 들어봅시다.
다온: 와… 얘 너무 맛있는데?
경진: 얘도 먹어봐. 먹을 만해.
여기서 얘는 둘 다 음식을 가리킵니다. 다온과 경진이 식인종이 아닌 이상 이 아이로 바꾸면 대화가 몹시 이상해집니다. 이 애로 바꾸는 경우는 비교적 낫지만,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현대 한국어에서 얘가 흔히 '이거'의 대용어로 쓰이기 때문인데, 역시나 본말에 없던 새로운 용례가 줄임말에 생긴 예시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례는 찾아보면 수없이 많습니다. 가령 이곳은 "여기를 문어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하지만, 전자의 쓰임새는 거의 장소에 한정되는 반면 후자는 사람에게 쓰이기도 하지요.
다온, 경진: [둘이서 다툰 경위를 설명 중]
승현: (다온을 가리키며) 여기가 먼저 잘못했네.
"이곳이 먼저 잘못했네."라고 하면 분명히 한국어인데 뜻을 알 수 없는 문장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