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추어 번역과 프로 번역
최근 게임 현지화 업체에서 흔치 않은 일을 받았습니다. 한국어 등 몇몇 언어를 고객사 측에서 (자신들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번역하기로 했는데, 그쪽에서는 전문화된 CAT 툴이 없는 만큼 용어 통일성과 맞춤법 측면에서 실수가 우려되니 번역이 끝나면 제 쪽에서 QA를 맡아 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개발사에서 CAT 툴을 쓰지 않고 게임을 직접 번역하겠다니 살짝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쪽에 한국인 직원이 있는 모양이라고 넘겨짚고는 일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개발사에서 '직접' 번역한 것은 아니고, 전작의 열성 팬에게 무료로 번역을 해 주겠다는 제안을 받아서 수용한 것이라고 하더군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받은 것치고 번역문의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의외로 질이 좋아서 놀랄 정도였지요. 가장 확연한 장점은 이것이었습니다.
틀에 박히지 않은 창의적인 번역
번역체가 두드러지지 않는, 실제로 한국인이 말하고 쓸 법한 자연스러운 문장이 눈에 띄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번역할 필요 없으니 딱딱한 번역체를 최대한 지양하고 캐주얼하게 번역해 달라'는 스타일 가이드상의 요구와도 부합하는 문체였지요. 예를 들면 cool을 '간지 나는'으로 옮기고 now you see it, now you don't를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로 옮기는 식이었는데, 너무 경박하다고 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게임 자체가 전혀 심각하지 않고 가벼운 분위기였기 때문에 제게는 신선하고 바람직한 시도로 보였습니다.
사실 어디서나 번역을 평가하는 첫 번째 기준은 정확성이고, 번역문이 얼마나 매끄럽고 잘 읽히고 분위기가 살아있는지는 뒷전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자는 비교적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지만 후자는 결국 주관적인 기준이기 때문일까요. 하지만 다른 매체도 아니고 게임이라면, 무슨 뜻인지 이해하느라 골머리를 썩일 필요 없이 즐겁게 읽어 나갈 수 있는 번역이 목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게임은 무엇보다 재밌어야 하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이 팬 번역은 웬만한 게임의 공식 번역보다도 좋게 평가받을 만한 측면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금 더 살펴보니 여러 단점도 눈에 들어왔습니다.
잦은 오역
돈을 받고 한 번역이였다면 문제가 되었을 정도로 오역이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Clark of the tome을 '클라크의 책'으로 번역한 것은 역자의 부주의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새로운 세계를 저장'으로 옮겨진 save a new world와 '가장 낮은 레벨로 입력'으로 옮겨진 enter lower level는 기계 번역을 방불케 합니다. shades는 '그늘'이 아니라 '선글라스'였고 die ready는 '죽음 준비됨'이 아니라 '주사위 준비됨'이었습니다.
이런 오역은 단순 실수나 영어 실력 부족 때문에 일어나기도 하지만, 스트링의 맥락(context)을 파악하는 추리력이 부족해서 일어나는 경우가 잦습니다. 앞에서 말한 die ready도 그렇습니다. die가 '죽음'이라는 명사로 쓰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제쳐두더라도, 스트링 ID에 이 문장이 '주사위'에 대한 내용임을 추측할 수 있는 단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shades 역시 장비 이름들이 나열되는 와중에 등장한 단어이기 때문에 '그늘'이라는 번역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게임 번역은 출판 번역 등과 달리 번역자에게 주어지는 맥락 정보가 굉장히 제한적이기 때문에 이렇게 소소한 단서에 주의를 기울여야 실수를 줄일 수 있습니다. 물론 조금이라도 불명확한 부분이 나올 때마다 적극적으로 고객사에 질문을 제기하고 정보를 요청하는 자세가 이상적입니다만, 현실적으로는 시간이 무한하지 않은 만큼 어쩔 수 없이 어림짐작으로 넘어가야 할 때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평소에 영어로 쓰인 게임을 많이 플레이하고 번역한 사람일수록 이럴 때 높은 확률로 정답에 가까운 추측을 해낼 수 있겠지요.
맞춤법과 띄어쓰기
직업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닌 이상 한국어 맞춤법과 띄어쓰기를 전부 올바르게 지키기란 어려운 것이 현실인 듯합니다. 엄격한 잣대를 적용한다면 어지간한 전단이나 홍보물은 물론이고 출판 서적이나 공익 광고에서까지 심심찮게 '틀린' 부분을 찾을 수 있으니까요. 저도 '들어 올리다'나 '오렌지 나무' 따위를 붙여 써야 하는지 띄어 써야 하는지 확인하려고 사전을 찾아볼 때면 가끔은 띄어쓰기를 규정대로 지키는 것이 의미가 있나 회의감이 들곤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맞춤법 오류가 문장마다 있는 수준이라면 눈에도 거슬리고 제품(게임)의 품위가 없어 보입니다. 특히 많이 보였던 대표적 오류를 몇 가지만 꼽아 보겠습니다.
1) 최고로 정교한 무기를 만들어줄 거에요. ('이에요'의 준말이므로 '예요'가 바릅니다.)
2) 이 자재를 다룰 수 있는 건 대장장이 뿐입니다. (체언 뒤에 오는 -뿐은 접미사이기 때문에 붙여 쓰는 것이 바릅니다.)
3) 몇 초 간 무적 상태가 됩니다. (비슷하게 쓰이는 '동안'과 달리 -간은 접미사이기 때문에 붙여 쓰는 것이 바릅니다.)
태그 처리
개행(linebreak)이나 서식 태그는 전반적으로 잘 옮겨진 반면 변수 태그(variable/placeholder) 처리가 아쉬웠습니다. 특히 hold [jump] to jump 등의 조작법 설명이 대부분 '[jump]를 꾹 눌러 점프하세요' 같은 식으로 번역되어 있었는데, 이렇게 변수 뒤 조사를 하나로 특정해 버리면 곤란한 상황이 생길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점프가 L 키로 지정되어 있다면 게임 내에서 'L를 꾹 눌러 점프하세요'로 출력되겠지요. 설령 점프 키가 L이 아니라 X라는 것이 확실하다고 해도, 요즘 게임은 사용자가 키 지정을 바꿀 수 있는 경우가 많은 만큼 가급적 조심하는 편이 좋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무난하고 흔한 해결책은 '[jump]을(를) 꾹 눌러 점프하세요'처럼 이중 조사를 쓰는 것이지만, 저는 어쩐지 '을(를)'이나 '이(가)' 따위의 이중 조사가 눈에 거슬려서 '[jump] 키를 꾹 눌러 점프하세요'처럼 변수 뒤에 조사가 따라오는 상황 자체를 우회하는 편을 선호합니다.
용어 통일성
CAT 툴의 핵심 기능이라 할 수 있는 TM(번역 기록)과 TB(용어집)는 일관성을 지키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뒤집어 말하면 CAT 툴을 쓰지 않는 경우 일관적인 번역이 많이 어려워진다는 말이기도 하지요. 이 프로젝트의 주안점 중 하나도 기존 번역을 바탕으로 TB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예컨대 Shadowy Sea라는 지명이 주로 '어두운 바다'로 번역되었다면 이 둘을 한 쌍으로 묶어서 TB에 등록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이 단어가 '그늘진 바다' 따위로 다르게 옮겨진 곳을 CAT 툴이 알아서 찾아주기 때문에 실수를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CAT 툴에서 TM과 TB의 도움을 받으며 번역을 해도 이 단계에서 의외로 오류가 많이 나오는데, 수만 단어를 개인의 기억에만 의존해 번역한다면 아무리 통일성에 신경을 쓴다 한들 오류가 부지기수로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번에 확실히 느꼈습니다. fighter가 '파이터'가 되었다 '전사'가 되었다, mage가 '메이지'가 되었다 '마법사'가 되었다 하면 한글만 보는 플레이어의 입장에서는 이들이 같은 직업인지 다른 직업인지 알 도리가 없으니 조심해야 할 부분입니다.
이렇게 한 개념을 여러 번역어로 옮기는 실수 외에, 여러 개념을 한 번역어로 옮기는 오류도 보였습니다. vitality라는 능력치와 HP라는 수치가 둘 다 똑같이 '체력'으로 번역된 것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지요. RPG를 많이 해 보신 분들에게는 익숙한 개념일 텐데, 여기서 vitality는 최대 HP와 HP 회복력 등을 결정하는 능력치였습니다. 한마디로 캐릭터가 얼마나 맷집이 좋고 튼튼한지 나타내는, DnD의 constitution에 해당하는 능력치였지요. 이렇게 서로 다른 두 개념을 '체력'이라는 한 단어로 뭉뚱그리면 플레이어도 혼란스러울 뿐 아니라 번역자도 'Vitality increases max HP' 등의 문장이 나왔을 때 번역이 몹시 곤란해집니다. '최대 체력은 체력에 따라 증가합니다'라고 옮겨야 할까요? 개인적으로는 '활력' 정도가 번역어로 무난하지 않나 싶습니다.
사실 저도 TB를 엄청 꼼꼼히 작성하는 편은 아닙니다. 얼마 전에 그리스 로마 신화를 다루는 게임을 하나 번역했는데, 신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TB에 등록하면서 내심 시간이 아까웠습니다. 내가 아니라 한국 사람 누구라도 Hermes는 '헤르메스'로 옮길 텐데 이걸 용어로 등록하는 게 의미가 있나 싶었지요. 그런데 막상 QA를 돌려 보니 제가 Apollo를 '아폴로'와 '아폴론'으로 번갈아 가며 옮겨 두었더군요. 그날 깨달음을 얻고(...) 앞으로는 성실히 TB를 채우자고 다짐했습니다. 게다가 TB를 충실히 작성해 놓으면 통일성 오류만이 아니라 가끔씩 오탈자도 덤으로 잡아줍니다.
이번 프로젝트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팬 번역을 여러 면에서 흠잡으며 이런 실수가 아마추어의 전유물인 듯 적어놓았습니다만, 실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저지를 수 있는 오류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최대한 신경을 쓰면 실수를 줄일 수는 있겠지요. 게임 디자인에서는 easy to learn, hard to master라는 표현이 흔히 쓰입니다. 배우기는 쉽되 완전히 숙달하기는 어려운 게임, 진입 장벽이 낮으면서도 깊이 있는 게임이 좋은 게임이라는 뜻이지요. 게임 번역이라는 분야도 이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별다른 전문 지식이 없어도 기초적인 영어 지식만 있다면 누구나 뛰어들 수 있기 때문에 진입 장벽은 없다고 해도 무방한 수준이지만,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각종 게임 장르에 대한 이해와 영미권 문화에 대한 지식과 준수한 글쓰기 실력 등 여러 소양이 필요하달까요. 이렇게 사소한 데부터 꼼꼼히 주의를 기울이고, '그거나 그거나'라는 타성에서 벗어나 조금이나마 더 나은 문장을 쓰려고 노력하는 것이 스스로 '프로'라고 당당하게 자부할 수 있는 번역가가 되는 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 NDA 등의 이유로 대다수의 예문은 게임을 특정할 수 없도록 조금씩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