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Performance와 성능

performance라는 단어에는 연주, 공연, 실행 등 여러 뜻이 있습니다. 보여주기식 쇼나 골을 넣은 후 하는 세리머니를 가리켜서 방송에서 '퍼포먼스'라고 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있지요. 그렇지만 이 글에서는 사전에서 '실적, 성과' 또는 '(기계의) 성능, 효율'이라고 풀이하는 뜻을 다루어 보려고 합니다. 예컨대 이런 경우입니다.

He praised his team for their performance.
그는 그의 팀이 훌륭한 경기를 펼쳤다고 칭찬했다.

He criticized the recent poor performance of the company.
그는 회사의 최근 실적 부진을 비판했다.

 

이렇게 쓰인 performance는 주체가 한 어떤 행동 내지는 그 결과입니다. 실은 구분 짓기가 애매하지만, 첫째 예문에서는 행동(축구 팀의 훌륭한 플레이)이고 둘째 예문에서는 결과(회사가 영업해서 낸 실적)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체가 사람이 아니라 기계여도 마찬가지입니다. performance가 좋은 기계는 쌩쌩 잘 돌아가서(행동) 훌륭한 산출물을 내놓는(결과) 기계, 다시 말해 성능이 좋은 기계인 것이지요. 따라서 많은 경우 performance를 '성능'으로 옮겨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게임 그래픽 설정을 설명할 때 흔히 나오는 이런 문장에서는 사정이 조금 다릅니다.

Adjusts the density of objects in the level. May have a high impact on performance on slower CPUs.
레벨 내 객체의 밀도를 조정합니다. CPU가 느린 경우 성능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Realistically simulates the behavior of light. Turn off to increase performance.
빛의 움직임을 현실적으로 시뮬레이션합니다. 끄면 성능이 증가합니다.

 

게임 좀 해보신 분들은 눈치껏 어떤 뜻인지 알아들으시겠지만, 문외한은 '성능'이 무슨 뜻인지 알 길이 없을 것입니다. 게임을 구동하는 컴퓨터나 콘솔이나 휴대폰의 성능이 그래픽 설정에 따라 변한다는 말일까요? 생각해 보면 상당히 알쏭달쏭한 표현인데, 이미 관습적으로 굳어진 탓인지 이런 맥락에서 performance는 십중팔구 '성능'으로 번역되고는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performance는 게임이 얼마나 매끄럽게 돌아가는지를 나타내는 척도입니다. 몹시 단순화하면 FPS(초당 프레임 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기 사양이 높아서 FPS가 높고 게임이 버벅대지 않는다면 performance가 좋은 것이고, 기기 사양이 낮아서 FPS가 낮고 툭하면 끊긴다면 performance가 나쁜 것이지요.

 

문제는 '성능'이라는 단어가 행동이나 결과가 아니라 주체의 특성을 가리킨다는 데 있습니다. 비유하자면 운동 선수의 '실력'이라고 할까요. 10초에 100m를 주파하던 육상 선수가 다음 날 모래주머니를 매고 뛰어서 10초에 50m밖에 주파하지 못했다면 기록(performance)은 절반으로 떨어졌지만 이 선수의 '실력'이 하루아침에 절반으로 떨어진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초당 60프레임을 안정적으로 뽑아내던 컴퓨터가 그래픽 설정을 최상으로 맞춘 뒤부터 30프레임밖에 뽑아내지 못한다면 FPS(performance)는 절반으로 떨어졌지만 이 컴퓨터의 '성능'이 한순간에 절반으로 떨어진 것은 아닙니다. 사소하다면 사소한 차이지만, 사전이 제시하는 대응어를 맹신하지 않고 원문의 맥락에 가장 적확한 표현을 찾아 쓰려고 노력하는 자세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예시가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