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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문 같은 번역문

어떤 번역이 좋은 번역인지 판단하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제 기준 중 하나는 '번역문을 보고 원문을 쉽게 유추할 수 있는가'입니다. 가령 'XX 이용 가능'이라는 표현을 보면 보나 마나 'XX available'의 무성의한 번역이겠거니 하는 생각에 조금 눈살이 찌푸려집니다. 반대로 영어를 번역해서 나온 문장이라고는 믿기 힘든 번역문도 종종 있습니다. 사전에 나오는 대로, 상투적으로, 틀에 박힌 대로 번역되지 않았기에 신선하고 생생한 느낌을 주는 문장들입니다. 저는 작업하다 그런 기발한(?) 문장이 떠오르면 다음에도 같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잊어버리기 아쉬워서 노트에 적어두곤 합니다. (물론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만...) 오늘은 그렇게 모아둔 창의적(?) 번역 예시를 몇 개 소개해 볼까 합니다.

Ah, screw it. The bossman is a jerk anyway. How can I help you ladies?
에잇, 좋아요. 그 꼰대 상사 엿이나 먹으라죠. 제가 뭘 도와드릴까요?

 

'꼰대'는 영문을 번역해서 나오기 힘든 표현입니다. 정확히 대응하는 영단어가 없기도 하고, 굳이 찾는다 해도 '꼰대'보다 사용 빈도가 떨어지는 단어들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대화문에 이런 표현이 들어가면 번역체 느낌이 덜 나고 조금 한국어 같아집니다. 

Great job playing along with Bailey. What an egomaniac.
베일리한테 맞춰 주느라 고생했어요.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이네요.

 

egomaniac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대개 '자기중심적'을 대응어로 제시하는데, egomaniac은 자기가 대단한 사람인 줄 아는 자아도취 이미지가 강한 반면 '자기중심적'은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뉘앙스가 강하지 않나 싶습니다. 가끔은 이렇게 사전 풀이에서 벗어난 번역을 시도해 봄 직합니다.

Now you see it, now you don't.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이런 플레이버 텍스트는 영미권의 관용구, 창작물, 밈 등에 대한 레퍼런스(오마주)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번역문도 한국 문화권의 관용구, 창작물, 밈(짤) 등을 번역에 녹이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누구나 아는 콘텐츠를 인용한다면 더 좋겠지만, 조금은 마이너해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플레이버 텍스트는 정보 전달이 목적인 글이 아니고, 애초에 원문도 아는 사람만 피식할 수 있는 내용이 많으니까요.

 

Whatever you want to do to it, it's your call.
구워 먹든 삶아 먹든 너희 마음대로 해라.

 

무난하게 직역하면 '(그걸) 어떻게 하든 너희 마음대로 해라.' 정도가 되었겠지만, 이렇게 적절한 관용구를 넣어주면 한층 읽는 맛이 생깁니다. 우리나라보다 영미권에서 이런 경향이 더 두드러지는 것 같은데, 번역하다 보면 글쓴이가 공을 들인 작문일수록 she looks great보다는 she looks like a million bucks, shut up보다는 put a sock in it 같은 관용구를 최대한 활용한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I never thought you would stoop so low as to kidnap my future husband!
엄마가 이렇게 갈 데 까지 갔을 줄은 몰랐어요. 제 남편 될 사람을 납치하다니요!

 

'갈 데 까지 가다' 역시 한국어 입말에서 자주 쓰이는 관용구이지만 흔한 영어 표현의 통상적 번역이 아니기 때문에 번역문에서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런 정겨운(?) 표현이 중간중간 들어가면 어쩔 수 없이 어느 정도 어색하고 딱딱할 수밖에 없는 번역문의 균형을 잡아주는 효과가 있습니다.